<선교문학: 추모>
추석엔 부모님이 생각난다

며칠만 있으면 곧 추석이 다가 온다. 오늘 우리 부부는 시부모님을 모신 봉안당 ‘무지개 뜨는 언덕’에 가기로 했다. 봉안당은 야외에 모신 무덤이 아니라서 성묘( 조상의 묘를 찾아가 손질하고 살피는 전통 의례)할것은 없다. 그저 부모님을 기억하고 추모 하러 가는 것이다.
재작년에 김포시립봉안당 ‘무지개 뜨는 언덕’ 부부단에 두분 부모님을 나란히 모셨다. 비교적 오래전에 소천하신 시아버님은 다른 납골당에 모셨었는데 시어머님 소천후 유골함을 이장(移葬)해서 어머니와 함께 부부단에 함께 모셔드렸다.
그랬더니 후손들이 찾아가서 추모 하기에 여간 수월한 것이 아니다. 봉안당 위치도 지하철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너무 편리하고 좋았다. 자동차로 가면 직접 봉안당으로 가면 되지만 지하철을 이용할때는 구래호수공원을 지나서 봉안당으로 가게 되어 있어서 공원에 소풍삼아 산책도 할겸 갈 수 있다.
재작년엔 봉안당에 추모하러 가면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텐트를 가져가서 호수공원 텐트존에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다가 오기도 했다. 신도시를 만들면서 조성된 호수공원엔 장미원도 있고 분수도 솟아오르고 가족들이 와서 캠핑 기분을 낼 수 있는 통나무 오두막도 몇채 지어져 있어 매우 운치가 있는 공원이다.
봉안당에 도착해서 나는 봉안실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도를 드렸다. 시부모님을 이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하는 기도를 드렸다. 부모님이 나의 남편을 낳아 주셨기에 내가 그와 결혼하여 삼남매를 낳아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것을 감사했다.
그리고 어느덧 나에게도 손주가 셋이 생겼다. 큰딸이 세 아이를 낳은 것이다. 예쁜 손녀 하나에 귀여운 손자가 둘이다. 이 모든 은혜가 오늘 봉안당에 안치 되어 있는 두분 부모님 덕분이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부모님 모신 봉안실 앞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한남자가 바로 옆 봉안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를 주시해서 보았다. 왜냐하면 고인을 추모하는 그 남자의 방식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는 봉안실 중간 쯤에 위치 해 있는 자신의 고인유골함이 들어 있는 유리문을 대뜸 손바닥으로 힘껏 밀듯이 한참을 밀고 그다음엔 쓰다듬고 나서 상당히 긴시간을 추모하는 모습이 안타까운듯한 안절부절한 자세로 있다가는 봉안실을 나가는 것이다.
나는 계속 주시하여 보고 있었기에 그 남자가 추모하던 유골함 위치를 알고 있어서 도대체 누가 소천하였기에 저리 특별하고도 간절한 태도로 추모를 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 봉안실로 들어가 보았다.
방금 나간 남자분이 한참을 어루만졌던 바로 그 곳에는 아마도 그 남자분의 아내인듯 싶은 여인의 마스크쓴 사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소천한 분 유골함 앞에 *** 집사라고 쓰여 있는것을 보니 기독교인이었나보다.
추모 하러 온 남자분은 아직 중장년쯤으로 건강해 보였었다. 아마도 일찍 떠난 아내를 추모하며 못내 아쉬운듯 유골함이 안치된 유리문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이나 밀며 쓰다듬었나보다. 웬지 그의 심정이 내게도 아련한 아픔으로 느껴졌다.
나는 옆에 앉아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부모님 추모하는것 보다 배우자 추모하는 것은 훨씬 더 마음이 힘든것 같아요.” 했다. 남편도 “아무래도 그렇겠지”한다. 그런데 어쩌랴 이세상의 모든 부부중 한사람이 먼저 갈 것이고 남은 한 사람은 방금 본 그 남자분 같은 저런 아픔을 견디어 내야 할테니… 한날 한시에 죽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에게도 부부지간에도 살아서 서로 잘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 한다. 인생 부대끼며 살다 보면 이쁘기도 하고 밉기도 한것이 가족관계 이지만 살아서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면 미워할 일도 싸울 일도 없어지고 서로 긍휼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부모님을 모신 봉안실에서 추모를 마치고 로비로 나오니 추모객들을 위한 서비스로 고인을 추모하며 편지를 쓰도록 편지지와 볼펜이 여러개 놓여져 있다. 나는 펜을 들어 순식간에 편지지 두장에 편지를 써내려 갔다 한장은 아버님께 또 한장은 어머님께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께>
추석을 앞두고 추모공원에 왔습니다 아들 며느리 왔다고 반가워 하시며 손잡아 주시지 못해도 두분과 보낸 지난 추억 그리워하며 아버지 어머니를 추모하는 마음을 드립니다.
아버지 살아 계실때 저희 부부가 중국에서 제자 둘을 데리고 나와서 인사 드리러 갔을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올 일을 알고나 계셨던듯이 절을 드리는 저에게 “내가 에미 너까지 보았으니 이제 가려나보다.“ 하셔서 저는 깜짝 놀라면서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건강하신데요“ 했었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꼭 20일 후에 아버지께서 마당에서 넘어지시면서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다섯 식구가 비행기표를 급하게 끊어 한국으로 나왔었지요. 소천하신 아버지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해처럼 한하게 미소짓고 계셨지요. 저는 아버지 께서 천국 입성 하셨구나 하고 금방 알 수 있었어요.
그리운 어머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머니 소천하시기 까지 10년 세월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 한지요. 비자제한으로 선교지에서 돌아왔다가 비자가 풀려서 다시 선교지로 떠나려던 저희 부부는 어머니께서 치매판정을 받아 누군가가 돌보아드려야만 될 상황이어서 선교지로 돌아가는 것을 보류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어머니 모시고 함께 보낸 10년 여 세월 우리는 가난했어도 넉넉지 못했어도 행복했어요. 어머니 모시고 제주여행도 다녀오고 매 주 목욕탕에 함께가서 등도 밀어 드렸지요. 어머니는 제가 해 드리는 평범한 음식들도 늘 맛있게 들어 주셨지요.
어머니께서 점차 치매로 인해 인지 능력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아들에게는 ‘아저씨’라고 부르시고 며느리인 저에게는 어떤 때는 ‘언니’ 어떤 때는 ‘선생님’ 이라고 부르셨지만 늘 배려로 저를 대해 주셨지요. 목욕시켜 드리는 저에게 “힘들지요?”하며 나의 노고를 알아 주시던 인자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 한 10년은 제 삶의 낭비가 아니라 큰축복 이었음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어머니 덕분에 저는 김포시에서 주는 ‘효부상’도 받았고 부상으로는 황금으로된 행운의열쇠를 받았지요. 사랑하는 어머니 그럼 천국에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큰며느리올림
봉안당에 가서 부모님을 추모하고 남편과 손잡고 돌아오는 오늘은 유난히 생각이 많아진다. 성경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 하신 진리의 말씀 따라 봉안당의 수많은 유골함을 보고 오는 길이기에 지금은 산 자인 우리 모두가 마침내 가야 할 천국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글/ 사진: 나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