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묻고 성경이 답하다 (001)
<죄와 벌>: 죄보다 깊은 사랑의 강을 따라
송금관 목사
<죄와 벌>을 펼치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와 나의 거리가 좁혀진다. 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어쩐지 우리 마음속 어딘가를 꼭 집어내는 것만 같다. 겉으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그 속에는 상처와 오만, 죄책감과 자기 기만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가 저지른 살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어두운 가능성에 대한 무서운 고백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 죄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게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를 ‘비범한 인간’이라 믿는다. 일반 사람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 그래서 도덕이나 법 같은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이 위험한 사상은 그를 결국 살인으로 이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험처럼 실행에 옮기고, 노파를 죽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죄는 결코 인간의 계산대로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삶은 그날 이후부터 끝없이 무너진다. 그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고백하지도 못한다. 누구도 그의 죄를 폭로하지 않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에게 잡혀 있다. 그의 죄책감은 날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그는 흔들린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고문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재판이자, 끝나지 않는 자백이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고통은 죄를 씻을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내가 이만큼 아팠으니, 이만큼 힘들었으니, 이제 그 죄는 덮였을 거야.” 그러나 고통은 결코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고통은 죄의 그림자를 따라갈 수는 있어도, 그 그림자를 지워내지는 못한다. 죄를 정화시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회개이고, 용서이며, 사랑이다.
그 사랑의 시작은 ‘소냐’라는 여인의 등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책감에 무너질 때, 그녀는 말없이 그의 옆을 지킨다. 그녀의 조용한 눈빛, 기도하는 손, 자신의 몸을 팔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마음이 그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소냐는 말한다. “당신 안에도 선함이 있어요. 당신은 죄인이지만, 사랑받을 수 있어요.” 그 말은 어느 설교보다 강력하고, 어느 재판보다 무거운 진실이었다. 그 앞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무너진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마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죄인을 만나실 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율법은 정죄하고, 사람들은 돌을 들지만, 예수님은 묻는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죄와 벌』 속의 회개는 이런 예수님의 용서의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죄책감은 스스로를 벌하게 만들지만, 은혜는 사람을 다시 일으킨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 대신 사랑 앞에서 무릎 꿇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과연 죄 없는 사람인가? 내가 뱉은 말 한마디, 외면했던 어떤 얼굴, 침묵으로 넘긴 책임들… 그것이 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나를 회복시키는 것은 자책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라는 것을. 그분은 정죄 대신 기다리심으로, 멀어짐 대신 다가오심으로, 내 죄를 끌어안으신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신다.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현대 사회는 여전히 처벌을 통해 정의를 세우려 한다. 물론 책임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변화는 처벌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누군가에게서 “괜찮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들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라스콜리니코프다. 각자 자기만의 죄와 고통, 침묵의 감옥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모두 소냐가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작지만 진실한 사랑의 존재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에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죄는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고, 고통으로도 갚을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죄를 끌어안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아무 말 없이 피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는 다시 살아도 된다.”